09. 4. 6.

무엇을 보기 원하느냐? ('입신' 간증 분석사례 1)



무엇을 보기 원하느냐?

"사로잡혀" 천국에 올라간 어느 K교회 교인은 "무엇을 보기 원하느냐?"는 '주님'의 3회 질문에 응해 차례로 생명책, 아브라함, 제자 요한을 보기 원한다고 했고, 차례로 그대로 이뤄졌단다. 천편일률적인 다른 간증에 비해 약간 특이한 흐름이지만, 내용인 즉 역시 황당한 부분이 많다.

"무엇을 보기 원하느냐?"는 물음은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해 주길 바라오?"라고 하셨던 주님의 질문 군(群)을 차용하지 않았나 싶다(맑 10:51, 뤀 18:41). 즉 딴 성구를 슬쩍 빌린 듯한 말투다. 주님은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을 미리 아시지 않고 막연히 '골라잡아' 식으로 우리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다 보여 주신다는 것인가? 사도 파울의 입신에서 그가 계시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계시가 이런 골라 잡아 꽝 식으로 임한다는 뜻인가?

이 입신자는 생명책 한 쪽에 많으면 '3개', 적으면 '1개' 씩의 이름만 적혀 있다는데 과연 그런지 어떤지는 훗날 우리가 하늘에서 확인해 볼 일이다.

그 다음..빌 해먼 집회를 다녀오면서 "믿음으로 성취하라"는 메시지에 마음이 갈급해진 상황에서 입신 때 "만난" 아브라함이 "나는 실제로는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입신자에게 '고백'했단다. 그 까닭으로는 두 번 아내(사라)를 '부인'한 일, 이슈마엘을 낳은 일 등이 떠올랐단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에 가깝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아내로서 '부인'한 일도 없거니와 인간은 살아가노라면 누구나 실수와 흠이 생기는 법이며, 그것 때문에 당초 가진 믿음이 폐기 처분되진 않는다.
아브람은 분명히 처음에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카나안으로 가라 하실 때 순종했고 후에도 계속 믿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된 것이다(창 12:1-8 참조, 13:6, 롬 4장 전체 참조).
그리고 하가르를 첩으로 들여 이슈마엘을 낳은 것도 아브람에게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카나안 정착 10년 후 사라가 그것을 원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이었다.

입신자의 주장과는 달리, 성경의 증거는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은 소망이 전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자기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을 믿고 소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백 살이나 되어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사라도 나이가 많아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불신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약속을 굳게 믿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을 이루실 능력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셨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롬 4:18-23 쉬운성경)

즉 불가능과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고 불신하거나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굳게 믿었고 확신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이 "실제로 저는 믿음의 삶을 산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한 입신자에게 '고백'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의로 여기시고 인정해 주신 믿음을 한꺼번에 부정함과 다름 없는 소치다. 이런 걸 가리켜 거짓 겸손이라고 한다. 천국(?)에서 이런 거짓 겸손을 보인 이 '아브라함'은 진짜일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입신자는 그 거짓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전이'를 원하며 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고인의 영들로부터 다양한 것들을 '전이'해 받는다는 것이 신사도운동자들의 특징이다. 즉 이 입신자는 아브라함을 가장한 친숙령에게 안수를 받은 셈이다. 그렇게 해서 믿음이 전이될 수 있다면 누구나 입신을 하려고 들 것이다.

이 입신자의 정격성은 갈수록 자동 부정된다. 그 다음으로 그가 평소 남달리 생각하며 보기 원했던 '제자 요한'을 만났는데 그 첫 마디는 "계시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란 것이었단다. 철학적인 것 같으면서 모호한 말이다. 어떤 계시의 삶? 계시를 따르는 삶?

그 다음 이 입신자의 말을 보자.
"– 아마 제가 요한에 대하여 가진 이미지는 <주님의 무릎에 기댈 만큼 주님과 가깝고.. 또 사랑을 받으며 주님을 사랑한 분, 그리고 하늘의 기이한 계시들을 받아 계시록을 작성한 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중략)..<주님의 무릎을 벤 주님과 가까운 주님을 사랑한 자>라는 저의 생각을 아는 듯.."

주님의 무릎? 그 무릎을 요한이 베고 누웠다고? 성경엔 분명히 요한이 주님의 가슴에 기대었다고 했다(요복 13:25, 21:20). 그럴 수 있음은 물론 주님이 어린 요한을 사랑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유대 식사 관습 상 다들 오른 쪽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마지막 만찬'은 당대의 유대식이 아니다.

입신자들의 성경 읽기와 이해 수준이 발각되는 대목이다. 모든 것을 자동으로 밝히 알게 된다는 천국 입신의 깨달음과 이해가 이 정도인가? K교회 측이 구태여 "무릎을 베고"를 "가슴에 기대어"로 고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성경보다는 이 입신에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했든가 아니면 성경을 잘 몰라서든가.

'아브라함'처럼 '요한'도 이 입신자 앞에서 참회 비슷한 것을 했다니, 이 입신자는 고백성사를 주재하는 카톨맄 사제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천국에도 이유빈 식 공개자백이란 게 있다는 말인가?

아무튼 이 입신자 앞에서 문제의 '요한'이 읊었다는 참회록 내지 고백성사(?) 같은 걸 들어 보자.

“나는 순탄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30대까지의 어부의 삶도 그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의 시기도 그랬고, 또 복음의 핍박을 받으며 지낸 사도의 시기가 그랬고, 밧모 섬에 갇혀 유배의 생활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만을 기억하지만, 그곳에 갇혀 지낸 시간도, 그리고 죽음을 당하기 까지 편하고 순탄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첫 머리는 좀 어색하다. "순탄하지 못한 삶이었다"이든지 "순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가 더 적절하다. 그리고 지금 요한은 이 입신자 앞에서 '순탄하지 않은 삶'이란 말을 세 번 연거푸 하고 있다. 이건 요한이 했다기보다 고백을 받은 입신자 자신의 입에 붙은 하나의 관용구나 생각이 아니었을까. Well..모든 사도들과 초기교인들은 누구나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런데 요한만 유달리 그것을 강조할 이유를 우린 성경에서 찾지 못한다.

'30대까지' 어부생활을 했다는 말은 30-39살 중 어느 기간으로 포함될 수 있는 말이다. 아마도 이것은 서른 살 때까지 목수 생활을 했던 예수님의 경력에서 유추한 듯 하다. 그런데 이 또한 엉터리다! 갓 서른 살 된 예수님이 12 제자들과 공동생활을 할 당시 요한은 형 야코보와 함께 어업생활을 뒤로 하고 주님을 따른 가장 어린 제자였는데, 예수님이나 다른 11 제자들보다 더 어린 그가 어떻게 예수님과 동갑나기인 30살까지 어부생활을 했겠는가?
그러므로 이 입신간증은 말짱 엉터리요 거짓말이거나 가짜 아브라함, 가짜 요한을 만났다는 결론이 된다.

'복음의 핍박'이란 말도 문법적으로 말이 안된다. 복음이 핍박을 가한다는 말인가? "복음 때문에 받는 핍박"이어야 한다. 아무리 전직 어부였다지만 요한이 그런 엉성한 문법을 썼을 리가 없다.
이 입신자는 입신 도중에 이 '요한'의 고백과 함께 (멜 깁슨의 문제작 영화) '크리스토의 수난'에서 요한이 도망가던 한 장면이 오벌랩 되어 떠올랐단다. 그렇다면 천국에서의 입신 도중 깁슨의 문제작 커트가 활용됐다는 얘기가 된다. 깁슨의 이 영화는 매우 비성경적이며 중세 수녀 안나 카타리나 에머맄의 리얼한 입신 간증을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출'식 잔혹/리얼기법을 모방해 리사이클링한 것이다.

'요한'의 참회이란 것을 계속 들어 보자.

“'제가 만일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였다면, 그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결박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도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좇은 자로 사람들은 기억하지만, 저는 그 수많은 기회에도 예수님을 당당하게 시인하고 함께 고통을 당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저를 예수님을 사랑한 자로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는 요한의 표정에는 그 당시를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읽혀졌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예수님 사랑함을 전이 받고자 안수를 부탁했을 때, 제자 요한이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여 주셨습니다."

마치 적당히 꾸며진 말 같이 들린다. 입신자가 해석한 요한 같은 말투다. 또한 과장스럽다.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좇은 자로.." 보다는 "골고타까지 따라간 것으로.."가 더 낫다. 요한이 예수님을 당당하게 시인하고 함께 '고통'을 당한다면, 예수님 대신, 또는 곁에서 채찍을 맞거나 십자가를 지기라도 했을 것이란 뜻인가? 어떤 고통을 뜻하는가?곁에서의 고통 분담? 만약 요한이 그러기라도 했더라면 복음서 내용은 달라졌을 것이다. 구약 예언은 분명히 목자를 칠 테니 모든 양떼가 흩어지리라고 예언해 놓았다.

만약 요한이 이토록 후회하고 부끄러워 어느 한국인 입신자 앞에서 참회할 일이라면, 당시 주님의 고난과 부활 속에서 이미 뉘우치고 잊었거나 오순절 성령강림 때 또는 파트모스(밧모) 섬에서라도 충분히 참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입신자가 빠트린 중요한 사실은 요한이 여느 제자와는 달리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가 주님께 마리아 부양을 맡아 돌보게 됐다는 것(요 19:26,27). 비록 요한이 일시 두려움 탓에 달아났는지 몰라도 십자가 아래서 주님의 어머니 곁에 서 있었던 사실은 비겁이 아닌 용기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 '부끄러운' 추억을 천국에서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간직하며 입신자에게마다 참회한다면, '문제아' 요한이 아닐 수 없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다 용서해 주신 것을 천국에서도 길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인데..필자는 그런 요한을 진짜 요한으로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아브라함과 요한의 현재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들의 믿음의 결과다. 그렇다면 은혜에 감격하고 찬양하며 살아 갈 일이지, 천국에서까지 과거를 시시콜콜 기억하며 천국 방문자들에게마다 매번 꼬박꼬박 참회를 해 가며 괴로워 할 일이 아닐 터이다.
그래서 이 입신자의 간증은 대상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고찰이나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얘기를 종합하여 꾸민 게 아닌가 라는 의혹이 자연스레 인다.

이 입신자는 이어서 '지옥' 구경을 하면서 두려워 떨다가 '주님'의 눕히심과 천사들의 '만짐'과 먹임, 그리고 B 전도사와 B 목사의 안수 등으로 다시 '지옥'에 이른다. 지옥 입구에서 싸탄이 그에게 악한 대적의 말을 한다. 그 다음으로는 불구덩이 지옥이 빙벽으로 변해 가더란다. 당시만 그랬는지 현재도 빙벽인지는 모를 일이다. 지옥이 빙벽으로? 지옥도 빙하시대로 바뀌는가?

또 지옥의 공중에 박쥐 같은 새가 날아 다니다가 입신자에게 달려들었는데, 이 새는 뾰족한 입으로 사람들의 눈과 살, 가슴을 쪼아 찢어 발긴다고 한다. 그래선지 주변엔 안구가 빠져 나와 대롱대롱 매달린 사람, 입이 불에 데어 문들어진 사람, 두 귀에 다이너마이트 폭탄꾸러미를 달고 있는 사람(폭발하면 부위가 찢어져 조각이 나서 흩어진단다) 등이 지옥에 보였단다.

물론 성경엔 전혀 없는 내용이어서 상상이 잘 안 간다. 지옥은 구더기도 타 죽지 않는 유황불이 타 오르는 영원히 목마른 불못일 뿐 더도 덜도 아니다. 그런데 거기 왠 박쥐가 있고 아닌 밤중 홍두깨 격인 다이너마이트가 왜 필요한가? 혹시 입신자가 어디선가 본 비디오 게임 장면은 아닌가?
그런데 그런 지옥을 아래로 내려다 보며 피눈물이 맺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단다.
"나는 이것을 계속적으로 지금까지 몇 천 년을 한 순간도 놓지 않고 보아야 했단다. 이것을 보기를 결단해 준 것이 고맙다. 나와 아픔을 공유하길 원해 주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참..난감하기 그지없다. 천국 보좌에서 하늘 대사제(대제사장)로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버지 앞에서 늘 중보하시느라 바쁘신(?) 예수님이 지옥 구덩이를 몇 천 년간 한 순간도 놓지 않고 지켜 보시며 피눈물을 흘리셔? 몇 천년이라는 막연하고 자신없는 숫자도 그렇다. 주님이시라면 몇 천 년이 아닌 정확한 연수를 충분히 대실 터이다. 그리고 지옥에서도 시간의 제약이 따르는가?또 주님이 지옥의 문지기나 감독관이시라는 뜻인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옥을 감시하시며 지옥을 바라보는 아픔을 입신자들과 공유하셔? 이미 영멸할 자들이 던져진 그곳을 주님이 왜 피눈물로 지켜 보셔야 하는가?

이 입신자의 간증에서는 또 지옥의 영혼들과 여유 있게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불못 구렁 저 편에 있던 낙원에서 부자를 대상으로 한 아브라함이라면 모를까, 일개 입신자로서는 전혀 불가해 보이는 황당무비의 내용들이다.

그 다음은 다시 천국에 올라와 눕혀져 '단 물복숭아'를 먹고 나서 들려 올려진 곳에서 다시 만난 주님은 주일에 간증된 '낫'의 기능에 대해서 '삭' 베든지 '사사삭' 베든지 강약의 조절을 주님이 하시는데, 그 날이 최상으로 유지돼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단다. 천국에 낫이 있는가? 있다면 날이 늘 최상이 아닐 수도 있는가? 그 낫의 날카로움은 인간의 전폭적인 신뢰와 순종에 의해 유지된단다.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성경엔 없는 말이다.
이 낫을 들고 시범적으로 베는 사람이 B 목사이고 그 뒤엔 커다란 '자동추수기계차'가 여러 대 일렬로 서 있었단다. 모두 사실적이기보다 은유적이어서 복음서 비유에 보태기 위한 또 다른 '기록계시'처럼 들린다. 모처럼 올라간 천국에서마저도 은유적으로 지내야 하는가? 시범적으로 벤다면 B 목사는 천국 교관? 추수기계차라는 게 천국에 필요한가? 그럼 그 연료는 하늘 휘발유인가?

또..이런 입신자들의 간증에서 공통되게 느끼는 점은 충격을 받아 힘이 빠질 때, 천사들의 만져주기(천국 머사지?)와 잠 재우기, 먹여주기 등 지상과 똑 같은 일종의 원기회복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천국이 늘 완전한 곳이라고 인식해 온 우리들에게 이런 점은 매우 의아스럽게 해 준다. 물론 대언자들도 그랬지 않냐는 주장을 할 텐데 대언자들이 계시를 기록할 때 모두 천국이나 지옥에 있었던 것은 아니잖나? 이 입신자는 또 천국의 다람쥐 씨와도 대화를 나눈다. 다람쥐가 사람에게 반말을 하는 풍도 그렇고 다분히 동화적이다. 혹시 입신자가 주일학교 동화담당 교사인지? 천국에 알밤 줍는 다람쥐가 정말 있는지, 다람쥐와의 대화가 가능한지? 물론 진짜 천국이라면 불가능이란 없겠지.

천국 다람쥐는 피조물 세계에서 훨씬 차원이 높은 인간에게 기본적인 존대어조차 쓰지 못하는지? 언제부터 다람쥐가 인간과 맞 먹는 공평 천지가 됐는지? 천국엔 그런 예의도 없는지? 차원이 거꾸로 된 것인지, 아니면 입신자 자신의 차원이 달라졌는지? 다람쥐들 중에도 믿음에 따라 천국/지옥행 구분이 있는지? 착잡한 마음과 수많은 의문점들이 인다. 그런데 천국 기행 입증에 이처럼 다람쥐와의 대화마저 동원돼야 하는가? 그렇게도 대화 상대가 적은가?

아무튼 이 다람쥐가 말하는 다음 부분이 있다.

"너 그리고 이거 아니? 여기 사람들(세상에 속한 하늘을 방문한 사람들이라는 감동이었습니다)도 가끔 온다! 또 어느 때는 여러 명(세계적으로 유명하다기 보다는 정결한 어느 사람들이라는 감동)이 한꺼번에 예수님과 모여 회의를 하기도 한단다."

흠..세상에 속한 하늘방문자도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 입신자의 간증이 참된 간증이 아님을 번개 같이 느낀다. 아니면 다람쥐가 가짜이든지. 왜냐 하면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천국에 결코 방문을 할 수 없을 뿐더러 거듭난 사람들은 주님처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주님이 거듭거듭 강조하셨기 떄문이다(요한복음 8:23, 15:19, 17:14,16). 그러므로 이 천국 다람쥐 도우미와 이 입신자의 '입신'은 거짓에 불과하다.

그리고..뒷 부분은, 유명하다기보다 정결한(?) 그 사람들은 하늘 전략 원탁회의에 수시로 참석한다는 '신사도'들의 낭설을 '뒷받침'해 주는 친숙령(?)들의 소위로 보인다. 아니면 그런 유의 예언을 들어 온 이 입신자의 상상이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