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시간부터 주님의 갈급함이 물을 쏟아 붓는 듯 제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P목사님의 말씀 또한 제 자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귀한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더 증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P목사님께서 안수 해주시자 성령의 불이 저를 덮었고, 제 생각, 자아를 모두 주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입가에 미소가 띄기 시작했고, 제 영이 가벼워졌습니다. ..성가대 가운처럼 하얀 가운에 금색으로 브이넥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저를 안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크신지 새삼 한 번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제가 예수님께 안길 때 배꼽도 안 되는 키였습니다)."
이 간증은 초두부터 문제가 발견된다. "주님의 갈급함이 물을 쏟아붓는 듯 임했다"는 표현은 어느 모로 보나 비성경적/비논리적이다. '주님의 갈급함'이 뭔가 모르게 모호한 개념이며 갈급과 물 쏟아붓기는 정반대개념인데도 병립시켜 억지때려맞추기 격이 됐다.
"자아 무너뜨리기"와 "생각, 자아를 모두 주님께 내어 드리기" 개념은 매우 관상적이고 비성경적이다. 무아경으로 가기 위한 소위 자기 비우기와 공허를 연상시킨다. 그런데도 '성령의 불'이 덮은 역사로 합리화된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육정을 이기는 것이고 자기부인이지 결코 '자기 허물기'나 자기포기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맘의 생각으로 인해 "영이 가벼워졌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성경에 없는 개념이다.
초자연적인 입신을 한 사람치곤 말이 정돈되지 못한 편이다. (요즘 카톨맄적이라고 하여 교계 일각에서 적극 피하고 '찬양대'로 대치해 온) '성가대'란 용어도 그렇지만 "흰 가운에 금색 브이넥을 갖춰 입었다"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인공적/세속적인 냄새가 난다. 아니 주님이 뭐가 모자라 세상의 '브이넼'을 갖춰 입으셨다는 것인가?!
예수님의 키가 너무 커서 자신의 키가 (예수님의?) '배꼽도 안 된다'는 표현은 용어도 그렇거니와 문장도 정리되지 못했을 뿐더러 결과적으로 묘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며, 예수님이 그런 거인이라는 암시를 성경에서 전혀 얻지 못한다. '새삼 한 번 더 느끼게 됐다'는 말은 예수님이 얼마나 (키가) 크신지 뭇 성도더러 깨달으란 말인가? 사람의 몸을 입은 채 신령체로 변화 받아 하늘로 오르신 주님이 갑자기 거인으로 돌변하셨다는 말인가? 그래서 이 '예수님'은 혹 타락한 거인 천사가 분장한 모습은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이 입신자의 글에도 사도 요한 얘기가 나온다.
"..사도 요한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갈색 머리에 금색 천으로 만들어진 관을 쓰고 있었고 옷은 하얀 가운에 옆구리 쪽에 금색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턱수염도 있었습니다. 나이도 많아 보였습니다. 저는 2주 전부터 사도 요한이 보고 싶은 갈망이 생겼습니다. 책을 통해 그리고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사랑의 통로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을 보자마자 제가 사도 요한에게 '어떻게 사랑의 통로가 될 수 있으셨어요?'하고 물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빙그레 웃으시며 '그냥 예수님을 사랑했을 뿐이랍니다'. 이 한 마디 외엔 아무 것도 없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입신자는 지금 사도 요한이 '갈색 머리'라고 말한다. 이 헤어칼러가 용케도 맞으면 좋지만 혹 이 다음에 딴 입신자가 딴 색깔을 부를 경우 모순문제가 발생한다. '옷은..가운에..옷을'로 중복된 것도 초자연 증언치곤 문법이 그르다.
그 다음 문제는 요한이 청년시절 가장 어린 나이의 제자였는데도 불구, 천국에서 (턱수염이 더부룩한) 늙은(?) 모습이라는 것. 딴 독자의 경우는 몰라도 필자의 소감은 왠지 서글프다. 천국에서도 모든 노인들은 영원히, 죽을 당시의 늙은 티를 내게 되는 걸까? 새파랗게 젊어 죽은 사람들만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천국이 좋을 게 뭔가..안타까운 노릇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젊어서 일찍 죽은 사람들은 천국에서도 더 '얼짱'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다들 일찍 가고 볼(?) 일이다.
이 입신자는 담임목사(?)의 설교에서 요한이 사랑의 통로(채널?)가 됐다고 한 말을 듣고 요한을 보고픈 갈망, '사랑의 통로'가 되고픈 열망이 있었다. 그래서 그 말 그대로 이 '요한' 앞에서 적용했고 답변을 받는다. 즉 B목사의 논조가 천국에 반영됐다고 보여진다. 과연 그럴까? 필자가 알기로는 천국에서는 오로지 성경과 주님의 논조만 반영되는 줄로 안다.
"그냥 예수님만 사랑했을 뿐이랍니다"란 '요한'의 왠지 어슬픈 말도 그렇다. 요한복음서와 그의 서신서를 보면 사도 요한은 예수 크리스토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 용어는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이 입신자의 주일학교형 "사랑의 예수님 지향성"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한 마디로 균형 잡히지 못했다!
그리고 "이 한 마디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단언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나 주님의 사랑이 아닌 사도 요한 자신의 '예수 사랑'이 중심된 것도 빈약하고 좀 석연치 않다.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엄청나게 많은 말들을 한 요한의 기록에 비하면 무척 대조적이다.
"('예수님'이)..다니엘을 제게 보여 주시며 인사를 나누게 해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푸른 가운을 입고 계셨는데,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신비스러웠습니다. 사도 요한보다 젊어 보였지만 나이는 모릅니다. 천국은 말을 안 해도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다니엘 역시 제 마음을 알고 제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게 다였어요..".
빛나고 깨끗하고 맑은 세마포 옷이 강조된 천국사회에서, 지금 다니엘이 입은 '푸른 가운'은 어떤 암시인지는 알 수 없다. 천국은 말을 안 해도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는데 '나이'는 모른다는 것도 좀 이상하기니와 영원한 천국에서 다니엘의 나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다니엘이 사도 요한보다 "젊어" 보인다는 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 다음에 확인해 볼 일이지만 별 의미 없고 좀 생뚱맞은 비교다.
아울러 사랑의 채널이 되고 싶어 단지 요한을 보고팠던 갈망이 다니엘에게 아무 설명 없이 이양/적용된 점은 다니엘의 독특한 위치와 특성이 전혀 무시된 게 아닌가 싶다. 아마도 독자들은 필자가 남의 말꼬리를 잡아 시시콜콜히 캔다고 짜증을 낼지 모르지만 필자는 이런 입신간증이 검증 없이 진리로 받아 들여지는 데 대해 신경질이 나려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저를 데려다 주셨습니다. 주변은 온통 하얀 이슬과 아주 하얀 안개 그리고 가운데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빛이 엄청나게 발산 되고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투명유리가 깔려 있었고 밑에는 바다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주 맑은 바다라 바닥에 자갈 같은 돌들도 보였습니다(마치 수족관을 바닥에 인테리어 해 놓은 듯 투명한 유리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12명의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12사도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일을 하고 있는 모습만 봤기 때문입니다."
하얀 이슬과 짙은 안개, 의자, 투명유리, 해저의 자갈돌, 수족관 비유 등 한 마디로 좋게 말해 문학적(?)이고 안 좋게 말해 자연적/세속적인 보좌의 모습이다. 12인(사도)들이 보좌 주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보좌 앞 24 장로들이 찬양과 영광 돌리기에만도 바쁜 것으로 묘사돼 있지 않은가. [ 보좌 앞 24장로 대신 12사도만 간증문 전체에 두 번 강조한 점도 다소 비성경적이다. 나머지 12장로들이 섭섭해(?) 할 노릇이다. 계시록을 얼마나 읽어 봤는지? 입신이 참이려면 자기 생각과 상상이 아닌 성경을 뒷받침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제가 요 근래 들어 예수님을 사랑하고 만나고 싶은 갈망이 너무나 큰 나머지 눈물 마를 날 없이 울면서 기도하여 눈이 붓기가 가라앉을 날이 없었는데..제가 주님을 만난 것이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 행복을 잠시 맛본 후 임재에서 일어났습니다."
"눈의 부기가.."가 맞다. 행복은 "잠시" 맛보는 게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의 영을 통해 늘 이어진다. "임재에서 일어났다"는 표현은 어법상 맞지도 않을 뿐더러 신사도운동권의 유행어다.
"(B) 목사님의 어머님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의 어머니께서는 아주 천사처럼 하얀 옷을 입고 계셨고, 얼굴에선 빛이 났습니다. 그 모습이 굉장히 밝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문을 여시는 그런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내가 천국에서 잘 있다고 전해주라고 하셨고..목사님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고개를 밑으로 내려다 보시며 목사님의 하시는 일을 보시고 흐뭇해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부각시켜 이를테면 은근히 B 목사 '간접추앙' 효과를 노린(?) 대목. 딱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은 천국에서 완전해진 어머니가 과연 B목사의 이런 비성경적인 신사도운동을 포함한 모두를 흐뭇해 하냐는 것이다. 천국이 지상의 세속운동을 옹호해 주는 그런 곳인가? 오히려 슬퍼하지 않을까?
"이날은 지하철 총신대입구역부터 기름부음이 시작되어 교회에 도착했을 때는 걷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자리에 앉아 '주님을 원합니다. 생명수로 나를 깨끗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하는데, 주의 강에서 마음껏 씻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관행성, 습관성(?) 입신까지의 도입 경로가 엿뵈는 대목으로 흥미롭다. 입신용 '기름부음'이 특정장소에서 시작돼 걷기도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주님을 원한다면서 생명수로 깨끗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맘껏 씻는 환상을 봤다고 한다.
크리스토의 피로 씻음 받은 우리가 왜 생명강에서 또 씻어야 하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생명강은 혹시 "때 빼고 광 내기" 용인가? 주님은 심지어 페트로의 발을 씻기시면서 아울러 손과 머리도 씻겨 달라는 페트로에게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시면서 "온 몸이 깨끗하다"고 하시지 않았는가(요복 13:8-10a)?
미안하지만 혹시 입신자는 지금까지 "그대들이 깨끗하지만 다는 아니네"(요복 13:10,11)라는 범주에 속해 있었는가? 계시록에 나타난 생명수 강의 유일한 용도는 해갈(요계21:6)과 주변 생명나무들의 결실이다(22:1-2). 어린양의 보혈로 이미 다들 깨끗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10시 50분까지 사로잡혀 있다가 '주님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기도의 줄로, 주님과 내가 닿을 때까지 가게 하소서' 기도한 후 '주의 보좌'를 반복하여 외치다 엎드러졌을 때, 제 영이 주의 보좌 앞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상 시간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모종의 사실성과 결과적인 정격성을 겨냥한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우리 속에 모신 성령님은 어쩌고 입신으로 '주님께 나아가길' 원하는지 알다 모를 일이다. 사뭇 관상적인 표현이다. 성령님에 우리 속에 계신데도 기도의 줄로 주님과 내가 서로 닿기까지 "가야" 하는가? 입신 갈급증과 습관성의 문제점이 느껴진다.
"1. 주의 보좌 앞 그 주변에는 12사도와 천사들과 많은 사람들이 저를 둘러싸고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보며 '이가 (B) 목사의 뒤에 한 줄로 선 자라'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에 대한 관심이라기 보다는 (B) 목사님에 대한 천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관심 때문에 저를 주의하여 보고 있었습니다."
점입가경이다. 역시 24장로 대신 12사도가 강조됐다. 입신자를 둘러 싸고 내려다 보는 '천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이 입신자 자신보다 B 목사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국에서도 개인이 이처럼 한 교회의 목회자/지도자 중심의 노예(?)여야 하는지 서글픈 심정이다.
이 부분에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B 목사의 '주'도 붙어 있다.
"이것은 저 개인(B 목사)에 대한 관심이 아니고 단지 저희를 통해 이루시는 주의 일에 대한 관심입니다. 천국에 있는 분들은 구름같이 둘러 싼 증인들이거든요. 그분들이 땅에서 주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입신 도중 주님께서 제가 주의해야 할 것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다는데 그것은 제 가슴에 새기고 이곳에는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B목사의 '주'는 'B목사에 대한 천국인들의 지대한 관심'이라고 명언한 입신자 자신의 말과 정면 배치된다. 또 주의 일에 대한 관심이 그 다음엔 주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다시 둔갑한다. 입신자가 정녕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말인가? 어딘지 모르게 정격성(?) 부각을 위해, 쏠리는 눈길을 애써 피하려는 거짓 겸허와 미화를 위한 허식의 느낌이다. 그리고 과연 B 목사에 대한 온 천국의 관심이 그리도 '지대'한가. 혹 K교회나 B 목사 자신의 희망사항들이 입신자들을 통해 계속 반영되는 건 아닌지.
"엎어져 있는 제게 주님의 보좌와, 예수님의 (맨)발과, 많은 천사와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주님 저를 주님의 옷자락으로 덮으소서'할 때에, 예수님께서 엎드린 제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 주셨습니다. “오늘은 아무 것도 보려고도ㅡ 말하려고도 하지 말고, 이 곳에 누워 있으라. 내가 너를 준비되게 하며 강하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보아즈에게 한 뤁의 말(뤁 3:6)을 인용한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라는 말은 노래 가사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기업 무를 자의 아내가 되길 원하는 여성이 기업 무를 자에게 의탁하며 보호를 요청한다는 뜻의 특이한 표현으로 성경 전체중 이곳에만 사용됐다. 요즘 정서에 호소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듯 한데 차라리 주님의 날개로 덮으소서가 낫지 않을까.
상대가 진짜 예수님이면 다행이지만 예수님을 가장한 악령일 경우는 "덮으소서"가 순식간에 원치 않는 '덮치소서'로 둔갑될 수도 있다. 신사도운동의 배후를 보면, 그런 우려는 자연적이다. 대뜸 누워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 내용도 다소 의아스럽다. 누움은 물론 쉬임도 되지만 사람으로서 가장 vulnerable한 포즈이기도 하다.
"제가 바로 뉘어졌을 때, 천정의 밝은 빛과 안개가 화려하게 보이고 그리고 각색의 보석들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보석을 좋아하는 것은, 저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천국을 소망함의 일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후“내가 너를 이 교회와 천국을 잇는 전령으로 세운다. 너는 기도의 줄을 잡고 내게 나아 올 것이며, 네게 날개를 달아 주노라.”하셨습니다."
보좌 앞 천정의 밝은 빛과 화려한 안개? 자못 몽환적인 정경이다. 입신자 자신이 안개를 선호하는 경향인 듯 한데 혹시 천국 보좌 모습이 안개뿜기 기계를 설치한 지상의 쇼 무대 모습과 비슷한가?
'사람들이 보석을 좋아하는 것은, 저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천국을 소망함의 일환이다'란 말이 그럴 싸 해 뵈지만 사실 성경은 영적인 보석과 세속적인 보석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며 땅의 보석들을 자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계 18:12). 뿐만 아니라 싸탄도 초기엔 주얼리로 화려하게 장식된 자이며 그래서 에덴을 아쉬워한다(에제키엘=에스겔 28:13).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지배하는 장차 망할 바빌론 성이 온갖 화려한 보석들과 함께 거래하는 상품의 하나가 인간 영혼이다(계 18:13)! 그리고 아까 위에서도 언급했듯 요즘 신사도 기적들 중엔 여성천사의 보석 떨궈주기 기적도 속출하고 있다. 그런데 목격자들의 눈엔 싸구려 보석처럼 보인단다.
"내가 너를 이 교회와 천국을 잇는 전령으로 세운다. 너는 기도의 줄을 잡고 내게 나아올 것이며, 네게 날개를 달아 주노라."- '예수님'이 입신자에게 엄청나고 굉장한 미션을 부여하는 이 대목은 은유적이고도 의혹스럽다. 성경엔 없는 '기도의 줄'(기도끈)이라는 표현을 예수님이 그대로 사용하신 것도 그렇거니와 우리 속에 계신 주님께 매 번 그 줄을 잡아야 나아올 수 있다는 식의 표현이 구약적 또는 관상적이고, '날개'를 달아 준다는 표현도 아무리 비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신화적/시적이고 좀 우습다. [ '날개 달린 전령'이란 일반적으로 로마 신화의 메르쿠리우스(그리스의 헤르메스, 영어의 머큐리에 해당)를 암시한다. 신들의 사절인 그의 사명은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것. ]
"3. 천국의 저의 집을 다시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히 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보이길 원하셨습니다. 5월 샨 볼츠 집회 때 본 하얀 색의 아담한 건물로 앞뜰에 많은 붉은색 장미꽃이 피어 있었고, 연못에 물고기들이 있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설 때, <확장 중>이라는 단어를 주시며, 천사들이 알려주기를, 주님이 설계를 변동하며, 많은 소망과 기쁨 가운데 계시다고 말하여 주었습니다. "
신사도운동권의 핵심에 있으면서 '사도'였다가 동성애 추문에 휩싸였던 라버츠 리어든의 여덟 살 적 천국기행 내용과 비슷한 세속 가옥 분위기다. 미상불 션 볼츠 집회 때 봤다고 하니 이해는 간다. 볼츠 역시 문제가 많은 신사도다.
"4. 다시 보좌 앞이었습니다. 저는 집도 좋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길 원한다고 말씀드리며, 그렇게 하고 싶은데 잘 안 됩니다, 도와주세요 할 때, 예수님께서 그 곳에 둘러선 사람들에게 안수하여 전이해 주라고 말씀하셔서, 모든 사람들이 저를 둘러서 손을 뻗어 제 몸에 안수하여 주었습니다. 그때 제가 예수님께 예수님의 제자들과 주님을 사랑하였던 많은 선진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을 전이 받길 원한다고 간절히 말씀 드렸습니다.
천국에서의 집단 안수와 전이(임파테이션?) 모습이다. 과연 주님이 이런 신사도적 '전이' 안수를 천국에서도 원하실까? 선진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아가페 사랑의 반영일 텐데 그것은 성령님께서 지상신자들을 통해 맺게 하시는 9 열매 중 첫 열매의 결실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지 않고 '선진'들에게 '전이' 받아야 할 사랑인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마저도 신사도운동의 방식과 전략을 모두 인정하시고 지지옹호하시는가란 인상과 의혹을 금할 길이 없다. 주권운동이라는 세속 세력을 배후에 업고 있는 신사도운동권을 주님이 유일한 천국 확장의 방도로 천국 '원탁전략회의'(?)에서 채택이라도 하셨다는 말인가? 너무나 아전인수 격 간증이 아닐 수 없다.
K교회 교인들은 성경보다는 신사도운동가들의 예언이나 체험간증 따위를 매우 중시한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들의 성경 이해는 B목사의 권위적 해석을 통한 것이 아닐까. 카톨맄적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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